2009년 2월 12일 목요일

"우석훈,정부경고에대한"내친구의딱한마디

최근 88만원세대의 저자 우석훈씨가
정부로부터 경고메세지를 받았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가 나에게 보낸 이메일이다.

내 친구의 딱 한마디! " 가지가지합니다.. 증말"

우석훈씨는 내가 좋아하는 학자 중에 한 명이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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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세대' 저자 "정부가 경고 메시지"
우석훈 박사, 블로그에 글 올려… 자세한 내용은 밝히지 않아




[노컷뉴스 사회부 임진수 기자] 인터넷논객 미네르바에 대한 검찰의 구속수사로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가운데 '88만원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가 정부 측으로부터 '정부비판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경고를 받았다고
주장해 파문이 예상된다.

우석훈 박사는 11일 CBS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정부로부터 (비판글을
자제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우 박사는 "어제(10일) 평소 알고 지내던 정부 관계자와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 같은 말을 들었다"며 "청와대 관계자가 직접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정부 관계자를 통해 나에게 이를 전달했고, 청와대가 원 소스인 걸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주변의 친한 분들이 내가 쓴 글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다"며 "주로 공직
쪽에 계신 분들이 그렇다"고 밝혔다.

우 박사는 "지난 정부부터 현 정부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경고 메시지를
받았는데, 이게 마지막 경고라고 생각된다"며 "자세한 내용은 지인들의 피해가
걱정돼 설명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앞서 우 박사는 이날 오전 1시 33분쯤 자신의 블로그에 '필화 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올린 짤막한 글에서 자신이 받은 경고메시지에 대해 설명했다.


우 박사는 "지난 정권에서도 나는 청와대에게 눈의 가시였는데, 본의가 아니게
주변 지인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좀 했다"며 글을 열었다.

이어 "'한미 FTA 폭주를 멈춰라'(우석훈저, 2006)를 내고 난 다음에, 몇 사람이
곤경에 빠졌었다. 필화 사건에 대한 거의 마지막 경고를 오늘 받은 듯 싶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우 박사는 "모르겠다... 감옥 보낼려면 보내라..."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파리제10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우석훈 박사는 지난 2007년 8월 펴낸
<88만원>을 통해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를 만들내며 20대 비정규직에 대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온 바 있다.

우 박사는 이후에도 <촌놈들의 제국주의>, <괴물의 탄생>, <직선들의 대한민국>
등 왕성한 저술활동과 함께 기고문 등을 통해 현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2009년 2월 9일 월요일

2009년 한국에서 일어난 일- 용산참사


2009년

IT 강국 한국
경제순위 13위
아시아에서 민주화와 산업화를 성취한 얼마 안 되는 나라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의 나라
노벨 평화상을 받은 전직 대통령이 있는 나라
그런나라 한국에서 2009년에 일어난- 황당 사건이다.
그래, 우리나라 다이나믹 코리아다.

사건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마무리와 해결을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해결 방식에 대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1. 어떤 네티즌이 "용산 참사" 기사에 대해 이런 댓글을 달았다.

반대하고 ,트집잡고 .......한심한 넘들 ......그럼 경찰을 모조리 처벌하면 승복할래?????사건의 진실은 폭력적으로 공권력에 도전하다가 일어난 사고이다. 공권력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든 철저한 처벌을 하여야 된다. 무슨 수식어가 더 필요한가 ?????좌.우 또는 이해관계를 떠나 더이상 트집잡는 행위는 없었음 좋겠다. 검찰발표를 그대로 믿는 성숙된 시민이 되시길 바랍니다.
(검찰 발표를 그대로 믿는 성숙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2. 다시금, 민주주의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얼마전 pd수첩을 보면서 - 아마도 오늘 용산참사 수사 결과를 브리핑한 사람일거다.
고인에 대한 부검에 대해 기자들이 물었다.
"가족의 동의는 안 받으셔도 되나요."
그는 단호하고,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네, 안 해도 됩니다." 단호했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마음대로 부검한다?? (근데, 정말 법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는 건가?)
그의 짧은 한 마디에서 그들이 서민을 바라보는 시각을 알 수 있었다.
영화 체인질링에서 나왔던가? 감시없는 권력은 부패할 수 밖에 없다고,


3. 치사한거 같아...

사건 1. 동네 인쇄소에 갔다가 발견한 전단지 한 장
철거민들이 잘못했다는 사진과 내용이 담긴 전단지였다. (컬러로 인쇄)
사장님 왈 "경찰이 놓고 갔어요."
사건 2. 요즘 다음 블로거 뉴스에 경찰 - 혹은 경찰을 지지하는 세력이겠지..-
로 추정되는 글이 무지 무지 하게 많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4. 어렵게 찾아낸 민주주의도 다시 빼앗길 수 있는가?
어제 영풍문고 - 인문학 코너에서 자리 잡고 앉아서 이 책 저 책 보다가
책 발견 - '민주주의 운동사' 였던 것 같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룩한 나라, 한국
이 땅에 살고 있기에 '민주주의'라는 것을 까먹고 살았다.
새삼 자랑스럽고, 애틋하게 다가온다.
오늘 신문만해도 부패한 정권에 대항한 마다카스카르 (아프리카 동남부의 섬)에서
100여명이 죽었다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렵게 찾아낸 민주주의도, 다시 빼앗길 수 있다...(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다.)

이번 용산 참사 수사결과 발표에 대해 반대하는 유족들은
법정에 서게 되겠지. 얼마나 괴로울까. 상처받지 않고 힘내길 바랍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서게 되겠지
2009년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용산참사'로 인해 한 동안 많은 사람들 마음 아파 하겠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2009년 2월 2일 월요일

분쟁지역 전문 피디 강경란 (펌)

전쟁의 눈물 쫓아 20년…그녀는 ‘다큐 독립군’
[뉴스 쏙] 한겨레가 만난 사람 분쟁지역 전문 피디 강경란씨

김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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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쟁 지역 취재를 위해 오지를 떠돈 강경란 피디가 5부작 다큐 <인간의 땅>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강 피디가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자신의 사무실에 붙은 <인간의 땅> 포스터 앞에서 웃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반군·탈레반에 3번 붙잡혀 수차례 ‘죽을고비’“눈앞이 하얘져요…전쟁터 체질 아니거든요”
‘국내최초’ 수식어 따라붙는 158cm 작은 거인오바마와 61년생 동갑 “나이도 잊고 살았네요”
강경란(48) 분쟁 전문 다큐 피디를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다큐 경력뿐 아니라 연예인처럼 키와 몸무게가 뜬다. 158㎝, 46㎏. 작은 체구이지만 그는 국내에서 세계의 전쟁터를 누벼온 분쟁 전문 저널리스트 가운데 ‘거인’으로 꼽힌다. 20여년간 아프가니스탄·버마(미얀마)·이라크·팔레스타인·코소보·인도네시아·네팔 등 ‘세계의 화약고’를 두루 누볐다. 국내언론 최초로 버마 민주화 인사인 아웅산 수치 여사와 캄보디아 현직 총리인 훈 센을 인터뷰했고, 탈레반이 파괴한 세계적인 불교유적 바미안 석불의 현장을 국내에 처음 보도하기도 했다.
그가 이번에는 대형 다큐를 가지고 전선에서 돌아왔다. 무려 2년이 넘는 제작기간을 거친 5부작 다큐 <인간의 땅>이다. 한국방송에서 곧 방영할 예정이다. 설을 앞둔 지난 21일 오후 마주한 강 피디는 “편집 작업을 하느라 이번에도 고향에 내려가기는 글렀다”며 웃었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장면들에 파묻혀 살아온 그의 눈빛은 생각과 달리 부드럽게 느껴졌다. 그는 “빗발치는 포탄과 총알이 아닌 그곳 사람들의 눈빛을 보러 다녔다”고 말했다.
-이번엔 다섯 편짜리 큰 기획이네요?
“2년이 넘게 걸린 다큐들이에요. 다섯 나라를 담았지요. 하나는 아프가니스탄, 반군이 있는 정글의 버마, 네팔, 방글라데시, 이라크의 쿠르드…. 기획안을 낼 때 취재기간 동안 역사적 변화, 굵직한 사건들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적중했어요. 아프가니스탄도 그렇고 버마도 그랬죠. 그런데 버마는 샤프란 혁명이 그렇게 크게 터질 거라곤 예상을 좀 못 했죠. 아프간에서도 (샘물교회) 인질만 안 죽였으면 했는데….”
그렇게 찍어 쌓인 비디오테이프가 30분짜리로 모두 1500개다. 2007년 봄 제작이 본격 시작돼, 꼬박 2년이 넘게 걸렸다. 마오 반군과 성매매 여성으로 갈린 네팔의 자매, 탈레반과 정부군으로 나뉜 아프간 형제의 영화 같은 삶이 담겼다. 무관심과 이기심 속에 사라져가는 소수민족, 빈곤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아시아 사람들의 모습들이 아프게 펼쳐진다.
그가 다큐멘터리 일을 시작하게 된 건 우연이었다.
“1980년대 중반 대학원을 마치던 해 여름에 케이엔시시(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국제·평화 문제를 다루는 일을 했죠. 그러다가 88~89년 무렵에 우연히 케이비에스에서 전문리서처 같은 일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 한국전쟁 다큐를 만들고 있었거든요. 그러면서 어깨너머로 방송 어떻게 돌아가나 배우고 그랬죠. 대선배 한 분이 케이비에스를 그만두고 나갔는데, ‘몽골리안 루트’라는 기획을 들고 엠비시 프로덕션으로 나갔죠. 최근에 방영된 건데 그 기획이 되게 오래된 거예요. 그때 나를 불렀고, 제가 미국 쪽 헌팅을 하면서 석 달 정도 미국에서 열심히 놀았지요.”
그러다가 제일기획에서 다큐전문 큐채널을 만들게 되고, 지인의 소개로 입사해 조직 생활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됐다.
“90년대 초반쯤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마음대로 하면서 참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큐채널이 삼성 영상사업단으로 가면서 얼마 안 돼 그만뒀지요. 1년 반 정도 있었는데 오래 있었던 거죠.”
-조직 생활이 잘 맞지 않으신가 봅니다.
“체질에 잘 안 맞아요. 큐채널 초창기만 해도, 하고 싶은 거 다했는데, 영상사업단 가면서 돈 많이 드는 것에 대해서 조금씩 견제 들어오고, 기다리라 하고, 결제라인 길어지고 하면서…. 내가 하는 건 시사성 있는 다큐라서 (일이) 터지기 전에 가 있어야 하는데,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유고사태 때 유고에 들어가려고 2~3주씩 마케도니아에서 기다리고 그러는데, 위에서 그게 말이 되냐고 하면 일을 할 수가 없는 거죠.”
강 피디는 분쟁 전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게 의도된 건 아니라고 했다.
“처음부터 분쟁을 다뤘던 건 아니죠. 아웅산 수치 여사를 좋아해서 한번 만나봐야겠다 해서 버마로 갔어요. 그런데 안 만난 것만 못하게 돼버렸지요. 좀더 카리스마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이길 바랐죠. 아웅산은 자꾸 ‘다이얼로그’를 얘기하는데, 내가 보기엔 대화로 풀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화를 화두로 잡고 가는 게 답답한 거예요.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 고통받으면서 희생하길 바랐어요. 그러다가 버마 분쟁지역을 계속 돌아다니게 되고, 점점 더 주제들이 전선으로 모이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그는 뜻밖의 얘길 했다.
“근데 사실, 난 전선 체질 아닙니다.”
-의외네요. 어떤 면이 그런가요?
“나 되게 무서워해요. 마음속으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총을 수없이 잡아봤는데 한 번도 방아쇠를 당겨본 적은 없어요. 분쟁지역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총을 주면서 한 번 쏴봐, 그러거든요. 방아쇠에 손가락이 가잖아요? 거기서부터는 딱 막혀요. 전쟁터를 가면, 그런 딱 막힘, 막아서는 지점이 있어요. 그걸 뛰어넘기가 정말 어려워요.”
-그런데 어떻게 20년간 전쟁터만 돌아다녔나요?
“포탄 날아가는 것을 취재하러 가는 게 아니고 거기 사는 사람들의 답답함을 찍으러 가는 겁니다. 처음에 이슬람 지역 사람들, ‘인샬라’ 얘기하는 거 너무 싫었어요. 특히 팔레스타인 가면 그러죠. 수천 년 동안 그들을 도와주지 않은 신인데. 요즘엔 이런 게 이해가 좀 돼요. 너무너무 대안이 없을 때, 정말로 막바지에 가면 나오는 게 인샬라고 신이죠. 그러면서도 늘 감사하잖아요. 오늘 안 죽고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요. 진정한 행복이에요.”
-연민도 있지 않을까요?
“내 앞에 죽어가는 사람들 병원으로 데려가는 일이 아니라, 어차피 저널리스트 바닥에 들어왔다면 다른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없을까, 그런 게 처음엔 고민스럽지요. 캄보디아에서 폴포트 막판 시절이었어요. 시내에 폭탄이 터져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내 옆에 있던 카메라맨이 병원까지 데려간 일이 있었죠. 그거 가지고 우리끼리 논쟁이 붙었어요. 니가 할 일이냐 그게, 니가 해야 할 일은 찍는 거다, 하면서요.”
-반군이나 탈레반한테 잡힌 적도 있다면서요?
“세번 잡혀봤어요. 그런데 아무 생각 안 나요. 눈앞이 허예지는 거 있잖아요, 일사병처럼. 그리고 거기 사람들은 이런 게 일상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죠.”
-이라크 전쟁 때도 위기가 있었지요?
“2003년 4월 미군이 바그다드를 함락하던 날, 우리나라 방송 기자들과 함께 요르단에서 이라크 쪽으로 국경을 넘고 있었어요. 영국 <비비시>(BBC) 취재진하고 모두 7대 차량이 함께 들어가고 있었죠. 그런데 차들이 주유소로 들어섰어요. 화장실 때문이었는데, 저만 빼고 모두 남자들이라서 제가 마지막으로 화장실엘 갔죠.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갑자기 뒤에서 총소리가 ‘따다다’ 나는 거예요. 얼른 뛰어나왔는데 내가 탔던 한국 차들은 다 도망가고, 총 든 이라크 남자들이 쫙 깔렸더라고요. 총 든 남자들이 도망가지 않은 비비시 애들을 차에서 끌어내 막 굴리고 있더군요. 한국 보도진 차는 다 가버렸으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일단 무장 게릴라들에게 가야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배짱 좋게 그쪽으로 갔죠. 그런데 총 든 남자들은 저한테 신경도 안 쓰고 지들끼리 막 싸웠어요. 통역에게 물어보니까 미군이 오폭해서 사람들이 몰살당했는데 그걸 보도해 달라고 비비시에 요구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비비시 통역이 바그다드에 더 많은 희생자들이 있다며 우리는 그걸 보도해야 한다며 그들을 설득했죠. 설득이 먹혀서 비비시 차가 막 출발을 하는데, 그때 덩치 큰 아저씨가 날 확 잡아당겨 자기 무릎 위에 태워줬어요. 비비시 차가 완전 만원이었거든요. 그들이 절 놔두고 갔으면 저는 여기 없을지도 몰라요. 나중에 바그다드에 와서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니가 좀 더 뚱뚱했더라면 아마 널 못 태웠을 거라고.”
강 피디는 결혼도 안 했고 집도 없다. 모아둔 돈도 별로 없다고 한다. 나이에 맞춰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평범한 삶과 달리 살아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처럼 보였다.
-결혼은 왜 안 했어요?
“못 한 거죠. 이제는 사람 만난다는 게 힘들어요. 새로운 일이 굉장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거든요. 옛날에는 한 번도 안 가보고 아는 사람도 없는 공항에 내려서도 힘겹다 두렵다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택시 기사 잡아서 호텔 가고 여행사 통해서 통역 섭외하고, 그걸 통해서 하나씩 풀어나가는,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기’를 해냈는데, 지금은 어딜 간다 그러면 겁이 나요. 편집도 어렵죠. 현장에선 상황이 힘들게 돌아가고 정신없고 해서 큰 윤곽으로 이해하고 디테일을 놓치잖아요. 그런데 필름을 다시 보면 되새김을 하게 되잖아요. 숨이 꼴랑꼴랑 넘어가면서도 정말 살고 싶어서 그러는 눈빛들이…. 그게 다 보여요. 스물도 채 안 된, 살아남은 여자들이 애들 줄줄이 딸려서 꺼이꺼이 우는 모습 보면 저 여자 인생이 어떨까, 정말 먹먹해져요.”
20여년 총알이 빗발치는 전선을 뛰어다닌 강 피디는 이제 휴식이 필요해 보였다. 마침 그 또한 이번 <인간의 땅>을 마무리하고 당분간은 박사 논문 작업과 책 쓰기에 매달릴 계획이라고 했다.
“난 내 나이도 잘 모르고 살았어요. 오늘 오는 길에 라디오를 들으니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61년생이라면서요? 마흔아홉살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내 나이가 그렇게 들었나, 깜짝 놀랐어요. 내가 61년생이거든요. 그런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좀 복잡해졌지요.”
하지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얘기가 나오자 그의 눈은 다시 반짝였다.
“한참 <인간의 땅>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가자에 있는 정보원한테 전화가 왔어요. 일이 터지기 직전이라고 오려면 어서 오라고요. 하지만 5부작 편집 작업을 해야 해서 가질 못했죠. 그러고 나서 의자에 앉아서 편집하고 있는데 일이 손에 잡히질 않더라고요. 내가 그냥 가서 서 있기라도 해야 하는데….”

» 분쟁지역 전문 피디 강경란씨
“분쟁지역에 터 잡고 장기 다큐 찍고싶어”
강경란 피디는 이화여대 사회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뒤, 20여년간 프리랜스 피디로 활약하면서 아프가니스탄·버마·이라크·팔레스타인·코소보·인도네시아·네팔 등 세계의 오지와 분쟁지역을 종횡무진으로 누비고 다녔다.
1989년부터 한국방송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에 참여해왔고 다큐 전문 <큐채널>에서 국내 최초로 버마의 민주지도자 아웅산 수치를 단독 인터뷰하는 등 분쟁 전문 피디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독립 다큐 전문 프로덕션인 에프엔에스(FNS)를 차리고 나서는, 탈레반이 파괴한 세계적인 불교유적 바미안 석불의 현장을 국내에 처음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강 피디는 “요새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아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사 논문을 마치고 책 쓰기 작업을 마친 뒤에는 (아시아 분쟁 지역 등지에)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장기적인 다큐를 찍고 싶다”고 말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